삶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대한민국에서 딸로 산다는 것이 참 고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남아선호사상, 여자에게만 지워지는 의무와 역할,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불편함.
저희는 그동안 수많은 한국의 딸들을 만나 오면서 삶 곳곳에 박혀 있는 가시가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나만 이런가? 나만 속상한가?' 딸이라면 누구나 느끼지만 입밖으로 내진 못하고 사라져 버린 감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속 안에 고여 있던 고름을 밖으로 꺼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들의 형체화되지 못한 채 흩어진 언어를 한 권의 책에 담아 감정의 골이 허상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낀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앞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힘을 나누기 위해.
서로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때부터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정신적인 독립이 필요함을 느꼈다. 나도 엄마도 서로에게서 좀 떨어져 있어야 관계가 개선될 것 같았다. 너무 붙어 있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 요소들이 우리 사이엔 너무 많았다.
그리고 엄마가 영원히 내 옆에 있을 순 없듯이, 나도 언젠가는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할 것이었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서로의 관계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정신적인 의존도를 낮추고 혼자 할 수 있는 부분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자립심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장으로도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엄마와 딸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45p
아들의 무심함은 딸의 살뜰함으로 해소된다. 아들의 무관심은 딸의 눈칫밥으로 해소된다. 그렇게 해소된 엄마의 맑은 감정은 다시 아들에게로 돌아간다. 자신을 챙겨주는 존재보다, 챙기지 않는 존재에게 더 많은 눈길을 보낸다. 무언갈 바란 건 아니지만 나에게도 향했을 수 있는 애정이 다른 사람에게 흐르는 것을 보는 건 참 슬픈 일이다. - 88p
사람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 짐을 덜기 위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택한다. 엄마에게 그 쉽고 빠른 방법은 딸인 나였다. 더욱이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엄마가 싫어하거나 피곤해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시작으로 폭주하는 오빠는 엄마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혼내거나 싸우거나 대화를 하지 않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패턴들로만 시시각각 둘의 관계가 변했다. - 121p
작고 얇은 책 한 권이지만 딸들만 느낄 수 있는 기묘하고도 이상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